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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梁山)이씨 종가 고문서 (보물 제1001호)
양산이씨 종손가 고문서는 ‘양산’ 명칭의 시초가 된 양산부원군 이전생의 사령왕지와 장남 징석, 손자 팔동, 팔동의 증손 몽란 등에게 발급된 왕지, 교서, 교지, 사제문, 녹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생의 왕지 1점을 비롯해 징석의 관계 문서인 왕지 4점, 교서 1점, 사패교지(賜牌敎旨) 3점, 사제문 1점 등 10점이고, 팔동의 교지 1점, 몽란과 관계된 교지(첩) 4점, 녹권 1건 등 5점, 총 16점이다. 이 문서들은 1398년부터 1605년까지 작성된 것으로 조선 전기의 각종 문서를 고루 갖추고 있어 당시의 고문서들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시조 이만영(李萬英)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조 때 공신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인천백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은 공신으로서 공조판서(工曹判書), 공명왕 때 순찰사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고 순찰사 시절에 전국을 순방하다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살았으며 후에 양산부원군으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양산으로 삼았다.
이전생의 세 아들은 이징석(李澄石), 이징옥(李澄玉), 이징규(李澄圭)로 ‘삼장수’로 잘 알려져 있다. 삼인(三人) 모두 무인(武人)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출생했던 마을은 삼사(三師)마을이라 불린다. 이징석(1401~1462)은 여진족의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으며,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이를 도와 정권을 잡고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징옥(?~1453)은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를 지냈으며, 1420~30년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이 혁혁했다. 또한, 형 이징석과 반대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 당하자 여진족의 후원을 업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고 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징옥의 난이다.
이몽란(李夢鸞)은 1599년에 무과 급제하였고,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양산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잦았을 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의 녹훈을 받았다.
시조 이만영(李萬英)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태조 때 공신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인천백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이전생(李全生)은 공신으로서 공조판서(工曹判書), 공명왕 때 순찰사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고 순찰사 시절에 전국을 순방하다 양산군 하북면 삼수리에 살았으며 후에 양산부원군으로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양산으로 삼았다.
이전생의 세 아들은 이징석(李澄石), 이징옥(李澄玉), 이징규(李澄圭)로 ‘삼장수’로 잘 알려져 있다. 삼인(三人) 모두 무인(武人)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출생했던 마을은 삼사(三師)마을이라 불린다. 이징석(1401~1462)은 여진족의 토벌에 큰 공을 세워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으며,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이를 도와 정권을 잡고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징옥(?~1453)은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를 지냈으며, 1420~30년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이 혁혁했다. 또한, 형 이징석과 반대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 당하자 여진족의 후원을 업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고 칭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징옥의 난이다.
이몽란(李夢鸞)은 1599년에 무과 급제하였고,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양산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잦았을 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의 녹훈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