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 시립박물관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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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환속상서문

구포환속상서문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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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환속상서문’은 양산군에 속해 있던 구포지역이 1869년(고종 6년) 동래군으로 편입되자 이를 다시 찾기 위해 1874년 정월(1월)부터 8월까지 8개월간 지속적으로 작성된 상서문이다.
당시 구포지역은 감동창(甘同倉)이 설치된 양산 지역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감동창에는 조세 창고 있어 많은 관선들이 드나들었으며, 쌀과 콩의 최대 집산지이기도 하였다. 양산 8개면 가운데 넓은 땅을 차지하였으며, 구포 1면(面)은 민호(民戶)가 실로 한 고을의 절반이 되나 될 만큼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팔로(八路)의 상선들이 무상으로 왕래하므로 삶이 풍요로워 돈과 재물의 출입이 다른 7개면보다 100배나 되어 양산에서 구포는 세금을 가장 많이 거들 수 있는 중요한 땅이었다. 그래서 구포 1면은 양산의 목숨 줄과 같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총 12점으로 구성된 이 상서에는 500년간 양산에 속했던 구포가 양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역설하면서 각 면(面)마다 환속조치를 요청하는 서명을 받았다. 상서는 성주(城主, 양산군수), 순상국(巡相國, 현 경상도 도지사), 의정부(議政府)로 올려 끊임없이 중앙정부에 양산군이 처한 어려움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구포 환속 상서문은 조선시대 말기 양산 지역사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구포를 다시 환속시켜 향촌사회와 경제를 수호하려고 했던 지역민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상소문 사이의 서사적인 개연성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한문·서지학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